▲ 한숭동 前 대덕대학교 총장 국립한국교통대학교 석좌교수

영화 ‘밀양’과 소설가 이청준님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스크린으로 보는 것과, TV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TV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영화는 영화 고유의 맛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죠.

2007년 5월에 개봉한 영화 ‘밀양’의 영어 영화 제목은 ‘Secret Sunshine’입니다. 구름에 가린 비밀스런 햇빛. 밀양이라는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물론 도시 '밀양‘의 의미는 영화 <밀양>의 영어제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밀양은 인구 10만이 갓 넘는 작은 도시입니다.

은밀한 햇빛(secret sunshine)의 도시 밀양! 그러나 한자로 보면 밀양(密陽)의 뜻은 그와 다릅니다. 햇빛 가득 넘치는 고을이란 뜻입니다.

영화 곳곳에서 햇빛이 넘쳐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밀양으로 이사 가던 초입에서 관객은 따가운 여름햇살 한가운데 멈춰선 신애 (전도연분)를 만나는 데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이청준님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빌려 왔다는 영화 <밀양>은 기독교와 절대자를 통한 상처의 회복과 삶의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영화에 비쳐지는 다소 종교적인 색채에 어색하거나 마치 그것을 재미있는 볼거리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먼저 접하고 영화를 감상해도 좋고, 그 반대로 해도 좋습니다.

‘서울 0823’ 혹시 영화 밀양을 보신 분은 기억하시나요?
영화 ‘밀양’으로 칸 영화제의 女주인공이 된 신애(전도연분)의 자동차 번호입니다. 신애가 서울에서 밀양으로 이사 가던 날, 자동차 고장으로 길에 서있을 때 카메라는 무슨 까닭인지 자동차 번호를 클로즈 업 합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작합니다. 영화의 광고카피는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스토리텔링 또한 그저 평범한 드라마 장르답게 일상의 언어로 풀어나갑니다.

# 비밀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도 있다…….

서른세 살. 남편을 잃은 그녀는 아들 준과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가고 있다. 이미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피아니스트의 희망도 남편에 대한 꿈도……. 이 작은 도시에서 그 만큼 작은 피아노 학원을 연 후, 그녀는 새 시작을 기약한다.

그러나 관객은 이내 곧 연약한 애벌레처럼 웅크린 그녀의 등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전도연을 목격하게 된다. <시크릿 선 샤인>, 이 영화는 전도연 연기 인생의 새 출발점이다.

# 이런 사랑도 있다…….

국도 한 곁에 고장 난 차를 세워 두고 전화로 안절부절 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낯선 외지에 사내아이 하나를 데리고 온 그녀. “신애”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가는 중입니다.

영화 <밀양>은 바로 신애가 찾아가는 지역인 경상남도 밀양이라는 지역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신애의 고장 난 차를 고치러 온 카센터 사장인 “종찬“(송광호분)에게 신애는 묻습니다.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비밀 밀(密), 볕 양(陽), 비밀스러운 햇볕. 좋죠?”...영화 <밀양>은 신애가 말한 대사 속 밀양의 의미처럼 참 비밀이 많은 영화입니다.

오히려 신애와 종찬 이라는 두 인물은 발가벗겨져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정작 영화 이면에는 관객들 스스로가 알아차려 할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송강호, 밀양 외곽 5km……. 그는 신애(전도연)를 처음 만납니다. 고장으로 서버린 그녀의 차가 카센터 사장인 그를 불렀던 것. 그리고 이 낯선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처럼 잊혀지지 않는 삶의 일부가 되어버립니다.

그는 밀양과 닮아 있습니다. 특별할 것이 없는 그 만큼의 욕심과 그 만큼의 속물성과 또 그 만큼의 순진함이 배어 있는 남자. 마을잔치나 동네 상갓집에 가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누구처럼 그는 신애의 삶에 스며듭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서 있습니다. 한 번쯤은 그녀가 자신의 눈을 바라봐주길 기다리며……. 그처럼 평범하지 않은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 그처럼 아파하는 여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 남자의 시선과 사랑을 그는 어떻게 표현할까요?

영화 <밀양>의 종찬 이란 캐릭터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신애는 너무도 아픈 상처를 안고 있으며 그녀의 삶은 처절하리 만큼 비극적입니다. 하지만 그녀 곁에서 언제나 바라보며 도와주는 종찬은 마치 관객들을 대변하는 듯 편안하고 일상적입니다.

오지랖은 그 누구보다도 넓어서 신애의 일이라면 참견 안하는 것이 없을 정도고, 툭툭 내뱉는 말이나 생각 없는 행동은 좋게 말하면 순수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바보같이 보일 정도입니다.

이렇게 인간냄새 풍기고 순수한 종찬 이란 캐릭터를 통해 자칫 어둡고, 처절하기만 할 수 있는 영화에 생기를 주고, 활력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주는 배려이며, 결코 불친절하게만 비치지 않는 이창동 감독만의 작가주의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집스럽지만 집착은 아니고, 자유롭지만 이기적이지는 않으며, 처절하지만 어둡고 무겁게만 그려내지 않는 것이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주는 매력입니다.

이감독이 5년 만에 선보인 영화 <밀양>은 그러한 매력을 더욱 부각시켜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어쩌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의도하는 메시지 하나하나를 찾으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늘 그렇듯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인간의 이야기이기에 관객들 스스로가 의미를 형성하고, 느껴보면 더욱 편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오아시스>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신작을 선보인 이창동 감독은 역시나 호락호락한 작품으로 관객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친절한 작품으로 관객들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순수성에 대해 이야기했던 <박하사탕>이나 인간의 본능과 그 속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던 <오아시스>에서처럼 <밀양> 역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 대상, 그를 통한 인간의 아픔과 상처, 나약함과 한계를 조심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전작들에서도 그랬듯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나약하고,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의 순수함은 관객들에게 때론 웃음을 주기도 하고, 영화를 보는 동안 여유를 주기도 합니다.

‘밀양’은 사랑의 상처와 상실, 고통이 넘실대는 달착지근한 연애이야기가 아닙니다. 영화는 2007년 시점에서 포착되는 한국사회의 다채로운 양상이 넘쳐납니다.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의 추악한 면면이 도처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전도연의 아들 ‘준’을 유괴한 후, 살해 현장에서 누군가가 자조하듯 거칠게 내뱉는 대사가 오늘날 '밀양'과 한국사회의 면모를 대변합니다. “우리 밀양이 언제부터 이리 됐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밀양의 충만한 햇빛이 드러납니다. 미장원에서 자르다만 머리까락을 신애(전도연)가 손수 잘라냅니다. 잘려나간 머리털은 무리지어 햇살 가득한 마당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쓰레기들 옆에 자리하는 머리털을 내리비치는 밀양의 한가로운 햇살. 어쩌면 거기가 신애가 살아갈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영화는 실루엣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많은 비밀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소중하다고 믿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소중한 게 있답니다.” “저기 작은 햇볕 하나에도 하나님은 의미를 주셨어요.”라고 말하는 약국 김 집사 아줌마의 대사는 겉으로 기독교적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햇볕”이라는 신애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작은 햇볕 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알지 못하는, 아니 그 의미를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절대자와는 구별되는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결국 영화 <밀양>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며, 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벌레이야기’입니다. 2008.7월말 타계한 故'이청준 (서편제 작가로 유명)'님이 1985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소재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물론 영화에서는 약간의 변형을 했지만, 영화 '밀양'에서 보여준 주된 주제는 같다고 보면 됩니다.

소설 속 화자는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구원 (자식을 유괴 살인한 자를 먼저 용서한)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살한 아내를 바라본 남편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카센터 주인 송광호로 바뀌었지요.

이 책은 읽은 많은 독자들은 과연 진정한 구원과 용서가 무엇인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청준님의 소설은 참 많이도 영화화 됐습니다. 정확하게 꼽아보지 않았지만, 아마 가장 많지 않을까 싶네요.

100쇄 이상 찍어내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당신들의 천국’(1976)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를 비롯하여,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임권택 감독이 연이어 영화화해 화제가 된 ‘서편제’ ‘축제’ ‘천년학’ 같은 작품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청준님을 또렷이 머리에 각인한 것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이청준님의 작품 어느 장면에선 어린 시절 동생과 형, 아버지를 한꺼번에 여읜 슬픔이 묻어나고 또 다른 작품에선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엿보입니다.

요즘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외수님의 작품세계와는 또 다른 모습이지요. 혹자는 그를 가리켜 주저 없이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 작가’로 꼽기도 합니다. 님은 천관산으로 유명한 고향 장흥에 안장되었습니다.

▲ 슬로시티 청산도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이청준 원작 ‘서편제’의 무대이다.

이청준님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축제’ 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인상 깊습니다. 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죽음을 탄생과 더불어 '축제'로 여기는 전통적인 한국적 정서를 영화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같은 해 나왔던 고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 신위>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고, 두 작품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박철수 감독은 십 년 전 대전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연극으로 인기를 끌다가 영화로 제작된 <오구>와 비슷한 코드입니다.
이청준님의 다른 소설들도 새롭게 각색되어 더 많이 영화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동국대를 나온 소설가 정찬주님은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막다른 길에서도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거기에 또 다른 길이 시작되고 있음이다. -<정찬주 "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정말 상투적인 말입니다만, 우리 인생사가 그런가 봅니다.

언뜻 보면 영화 '밀양'을 구원과 기독교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로 생각하지만, 이 영화 속 종교의 메시지를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을 영화로 나타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돈과 남편 그리고 아들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면서 자신을 괴로움에서 놓아주고 용서해줍니다.

영화 <밀양>의 포스터는 참으로 많은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신애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를 뒤에서 물끄러미 안타깝게 바라보는 종찬은 애처롭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한 켠에서 비치는 햇볕은 따뜻해 보이기도 하지만 따갑고, 슬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포스터의 느낌이 아마도 영화 <밀양>의 느낌입니다. 때론 따뜻해 보이는 햇볕, 때론 따갑기만 한 햇볕, 그리고 종종 슬프고 가슴 아프게 하는 햇볕…….그것은 곧 신애의 삶이고, 종찬의 시각이며, 관객들이 이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햇볕 하나에도 의미를 주셨다는 김 집사의 말처럼 어느새 우리는 영화 속 중간 중간마다 비치는 햇살 하나하나에 의미를 만들어 가고, 엔딩과 함께 살며시 비쳐주는 햇볕을 보며 자신만의 의미와 여운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도 아닌, 그렇다고 좌절도 아닌 신애의 삶을 보면서 관객들 역시 “비밀스러운 햇볕”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그녀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살다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되고, 증오하고 또 누군가를 용서도 해주곤 합니다. 이러한 자질구레한 삶이 모여지는 게 우리의 큰 삶의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밀양'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들의 과거를 되새기게 해줍니다. 또 그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빛이날 만큼 특별하지 않지만, 눈물지을 만큼 소중한 삶을 살게 하는 일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