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란 말이 있다. 못할 일이 없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요즘 농협중앙회가 하는 행태에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박근혜 정부의 실세로 알려진 정치인이 중앙회장 권한 강화를 위한 농협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하더니 이제는 중앙회가 한 언론을 통해 경제지주 백지화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더구나 전산망 마비, 감사원 감사, 금융지주회장 사임, 국세청 세무조사 등등 꼬리를 물고 터지는 악재들 속에서도 경제지주 백지화를 들고 나선 것을 보면 중앙회가 어딘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간 큰 행보를 거침없이 할 수 있겠는가? 노무현 정부 때도 한때는 농협중앙회가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제왕적 회장시절이 있었다. 그 때의 망령이 되살아나 농협개혁과 경제지주 분리 독립을 도루묵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찝찝하기만 하다.
“경제지주 백지화” 말 바꾸기
2011년 3월 11일 농협중앙회 신경분리를 위한 농협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모두들 1994년 김영삼 정부 때 시작된 17년 묵은 숙원이 해결됐다며 반겼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경제사업을 활성화시켜 농협을 농민조합원을 위한 판매농협으로 거듭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개정 농협법은 중앙회에게 일단 중앙회 자회사를 관리하는 경제지주회사를 만들되 2015년 3월 2일까지 중앙회 유통·판 매 사업을 모두 경제지주로 이관해 명실상부한 경제지주로 만들어 중앙회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 나머지 경제 사업은 2017년 3월 2일까지 경제지주로 이관하도록 부칙에 명시했다. 그리고 그동안은 현재의 중앙회 경제대표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사업 이관 및 경제지주 설립 작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했다. 당초에는 2012년 3월 2일 금융, 경제지주 동시분리를 주장했으나 회사 설립, 조세 등 걸리는 문제가 많아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농협의 주장을 존중해 그렇게 정해졌다.
그러나 농협이 그 결정을 처음부터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신경분리문제가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후 2011년 3월 3일 농협법 개정안이 국회 법률심사 소위원회를 통과할 때까지 2년여 동안 농협은 경제지주설립을 반대했다. 농협은 농협자본금(15조원 추산) 전액를 털어 금융지주를 만들 생각만 했다. 그러나 농업계와 전문가들은 경제사업 활성화를 위한 경제사업 분리 독립을 주장했다. 동상이몽이었다. 1961년 농협과 농업은행이 통합하면서 농협은 사실상 금융기관이 됐고 농협중앙회의 자본은 모두 금융자본이었다. 이 때문에 중앙회 경제사업부서는 금융부서로부터 사업자금을 차입해 경제사업을 하고 원금과 이자를 갚는 식의 경제사업을 50년 동안이나 했다. 그러는 사이 경제사업은 형식적이고 전문성도 없고, 회원조합과 조합원에게 실익을 주는 경제사업이 아닌 경제지도 사업만 해왔다. 그래서 경제사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경제사업 부서가 독립된 자본을 가지고 중앙회와 금융으로부터 분리 독립돼야 했다.
그래서 일본과 같이 농협경제연합회를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연합회를 만들려면 중앙회를 해산하고 중앙회 자본금을 회원조합에 배분한 뒤 회원조합이 다시 출자해 연합회를 만들어야 하는 절차적 어려움 때문에 아예 농협중앙회를 그대로 경제연합회로 전환시키자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농협은 모든 안에 반대하고 기존 체제만 고집했다. 2년간의 지루한 공방 끝에 농민단체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정부와 국회가 머리를 짜내 찾아낸 차선책이 현재의 지주회사 방식이었다. 농협은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다 금융지주 설립마저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2011년 3월 3일 이 안을 수용했다. 그런데 그동안의 농협행태로 보아 농협이 다른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의구심 때문에 국회는 경제사업의 경제지주 이관날짜를 못 박는 부칙조항을 만들고 반드시 지키라고 했고, 농협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조세특례니, 공정거래법 적용배제문제도 그 때 정부관계자를 불러 걸렀던 사항이다. 그 때의 기록들이 국회 속기록에 남아있다.
무소불위 행태…믿는 구석 있나
그런데 정권이 바뀌자 농협은 말을 바꾸며 경제지주 백지화에 나선 것이다. 경제지주는 아직 분리·독립되지도 안했는데 비효율적이라니 할 말이 없다. 연합회 방식으로 만들어야 하는 데 지주회사방식자체가 잘못되었다느니, 조세, 대기업집단 지정, 중소기업적합업종, 운운하는 것을 보니 이런 후안무치가 따로 없다. 언론보도 후 비판이 일자 사실이 아니라며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중앙회는 새 정부 출범 이후부터 은밀하게 경제지주 백지화 방안을 연구해 왔다. 그런데 정작 한심한 쪽은 정부다. 이런 사실이 보도되자 농식품부 관계자가 딱 부러지게 2015년 3월 2일까지 중앙회 유통판매 사업일체를 법대로 차질 없이 경제지주로 이관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농협경제사업을 2017년까지 경제지주회사로 차질 없이 이관한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2011년 개정 농협법을 잘 알고 있는 농식품부 관계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내 귀에는 때를 보아 2015년 3월 2일까지란 부칙조항은 고칠 수도 있다는 복선이 깔린 말처럼 들린다.
농민과의 약속 뒤집기 안 될 말
국민의 혈세 5조원이 투입되고 300만 농민 조합원과 약속한 경제지주 설립을 뒤집으려는 것은 농협중앙회의 국민과 조합원에 대한 배신이며, 중대한 범죄행위다. 농협은 판매농협으로 거듭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정부는 반드시 지키도록 해야 한다. 차제에 정부는 경제지주 백지화를 획책하는 농협 내 반개혁세력을 찾아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경제지주 설립 자체를 무산시키거나 부칙조항을 개정하려는 법률개정안을 또 어떤 국회의원을 내세워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하지 않으란 법이 있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농협중앙회장은 직을 걸고 분명히 밝혀야 하고, 장관도 분명히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발생하는 만약의 사태에 대해서는 장관과 농협중앙회장이 책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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