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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10 - 율법과 복음의 권위는 다르다(히2:1-4)
박덕규 목사  |  와동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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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17  18: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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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동중앙교회 박덕규 목사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크게 오해하여 반발했다.
예수께서는 공의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드셨으니
그러므로 율법을 위반한 간음한 자나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죄인에게 회개하라 하셨음이다.
사람들은 그가 율법을 폐하려는 줄로 여겼으니,
율법은 회개를 전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존중함으로써 심판만 있을 뿐임이다.
예수께서 전하는 바대로라면 누구든지 죄를 짓고 회개만 하면 된다는 것이니
결국 죄를 짓도록 방조하는 셈이라고 오해한다.
간음한 자나 살인한 자나 도둑질한 자나 어떤 죄인에게도
회개하여 용서를 받게 하심으로써
용서라는 초법으로 인해 죄를 짓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 하심이 아니요,
율법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능히 하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보다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을 전하신 것이다.
이렇게 일하시는 이가 곧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에 매인바 되어 두려워하며 숨죽이며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그들 저주받은 현실, 곧 눌리고 눈 멀고 귀 먹고,
병든 자,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해방시키실 때,
유대인이 겪어야 했던 혼란, 그 갈등…
지고의 법으로 알고 율법만 제대로 지키면 지상천국을 이룰 것이겠으므로
그 엄정한 법을 지키려고 몸부림 쳤지만 결국 그 율법에 의해
망하고 괴로워하던 그들에게 전파되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복음의 소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함이었다.
율법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회개하라”하심은
먼저는 죄인에게만 들려지는 복음이요
다음은 용서를 전제한 음성이었으니
하나님의 공의보다 긍휼과 은혜가 전제된 하나님의 약속일 터.
그러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했던 이들에게는
자신에게는“죄인이라는 말과 용서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하나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용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
성령의 역사하심은 결코 현실에서 용납할 수 없을만한 기사와 이적이었으므로
이 황송한 메시지를 듣는 유대인들은 앞 다투어 그에게로 달려왔고
현재하는 하늘나라를 체험하고 자유를 얻은 자가 많았지만,
그들 종교지도자들은 이단자가 나타나서 사기를 치는 것일 터였고,
마술에 잡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기에 그들은 그가 귀신들렸다, 미쳤다며 수군거렸으니,
그가 참 메시아였다면
율법을 어겨 그 저주 속에 사는 죄인들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들, 곧 율법을 지켜
십일조를 드리고 금식하는 자기들의 친구가 되었어야 한다고 믿고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핍박하더니
마침내 그를 죽였고 살인자가 되었다.
오늘 우리들 현실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그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부활로서 복음을 완성하셨다.

율법은 몽학선생 아래 둔 것이고, 복음은 장성한 자의 법이다(갈3:24-29).
과거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마음에 있지 않았으니
율법은 귀로 듣고 그 육체로 행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의 성령을 타고 우리들 심령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장성한 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을 알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는 어린아이부터 큰 자까지 하나님을 스스로 알게 됐다(히8:10-11) 함이다.
자유자는 자기 스스로 벗어날 힘이 있다(요8:31-32).

골방에서 어머니가 귓속말로 가르치던 율법(마10:27),
어머니는 어린아이의 언어 교사요, 행동을 가르치고 정신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율법은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만 가르친 것이요(신6:4-9),
그러나 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된다.
그래서 성경에‘골방에서 말하던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했다.
곧 율법은 온실 안에서 화초를 기르는 방법과 같고,
복음은 온 세상에 씨를 심어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다(마24:14,막16:15) 할 것이다.
복음이나 율법 모두 하나님의 명령이요 사랑이다(요3:16,요일4: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비를 내리시듯 위에서 밑으로 흐르는 사랑이다.
복음은 불의한 인간 앞에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롬1:17,3:21-22) 기능을 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의 앞에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이다(롬3:19-20).

율법은 매우 두려운 법이다.
우리가 법을 두려워하는 것은 심판을 두려워함이니, 곧 나를 위해서다.
법을 기키는 것은 법에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법을 어긴 자는 법이 심판한다.
율법의 권위는 율법을 보증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다.
법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이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 보응을 하신다(신28:15-68).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안식일을 범하거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게 보응하시고 그 법을 보호하신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보응이 없으므로 그냥 편안하게 지나간다.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또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누가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을 잡는가?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다.
이렇게 당연한 일을 했다 해서 누가 상을 주는가?

그러나 교통 법규를 어기면 당장 교통순경이 와서 붙잡는다.
이처럼 법을 지키면 아무 제재(制裁)가 없지만
그 법을 어기면 즉시 진노나 저주가 임한다. 이것이 율법의 권위다.

구약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율법을 지킬 때는 그냥 잘 먹고 잘 살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당장 보응이 나타난다.
성경에 율법을 어긴 자들이 받는 보응이 많고,
현실에서 보응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율법을 굉장히 두려워한다.

율법을 어기면 매를 맞고, 보응을 받아야 회개가 성립된다.
보응을 겪고 나서야 과거를 해결하고 돌아온다. 죄수가 감옥살이하는 것 같아.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히8:9)
기억하지 못하고, 돌아보지 못하므로 보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보응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강한 규율에 맞춘 규격품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보응을 받으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으로 생각하고,
보응을 받지 않으면 상당히 정상적으로 신앙생활 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의 율법 아래서의 방법이요 율법하의 수준이다.
율법은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이요, 범하면 율법의 권위로 보응하는 것

오늘날, 복음도 보증 하시는 이가 있는데,
복음은 지키는 법이 아니라 믿는 법이요,
믿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보상을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눈에 보도록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불순종하는 자에게 보응하리라는 약속이 있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보상한다는 약속이 있다.
보상을 무시한다면 맹종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약속과 보상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율법을 어기면 언제나 보응이고, 복음을 순종하면 언제나 보상이다.
구약 시대에서
능력은 특수한 것이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한 저주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신약 시대의 능력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일반적인 것이다.

율법의 효력은 어긴 자에게, 복음의 효력은 순종하는 자에게 따른다.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불순종하는 자에게 재앙이,
복음이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은 증거 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보상해 주신다.
율법에 순종한 자는,
종의 일에 순종한 것으로서, 자기 임무를 한 것뿐이므로 생명만 유지할 뿐이다.
복음을 순종한 아들에게는 칭찬이 있다.
종이 게을러서 직분을 망각하면 당장 형벌이 내려지지만,
아들이 일하지 않는다고 형벌하지는 않아. 아들에게는 잘한 일에 대해 칭찬이 있다.

두려움으로 강요된 타율적인 복종이냐?
진리를 깨닫고 은혜에 감사하는 자발적인 신뢰냐? 신구약의 차이다.
율법은 억지로라도 지키면 무사하고,
어기면 재앙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했으나,
신약 때는 복음을 안 믿으면 현실에서는 아무 일이 없고,
믿으면 현실에서 놀라운 기사이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증거 하신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 영혼은 이미 저주와 사망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미 죄와 사망으로 죽어 있는 자에게 그보다 큰 재앙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에는 기사와 이적을 기록하고 있다(히2:4,롬15:18).
기사는 하늘로부터 드러난 것이고 이적은 이 땅에서 나타난 것이다.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나타난 것들은 기사에 속하고,
성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들은 이적이다.
환상을 보거나 방언을 말하거나 능력을 행하는 것 등은 기사다.
기사는 하늘에서 직접 부어 주시는 것이기에 가시화되지 않지만 권위와 권능이 함께한다.
우리가 능력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기사가 임한 것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신 다음부터 교회에 기사가 임했다.
그리고 성도가 역사하는 곳마다 이적들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기사가 임한 사람에게는 이적이 있다.
능력을 행함으로써 나타난 것이 이적이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문둥병자가 낫는 등의 신유는 기사가 아니라 이적이다.
기사가 가시화되는 방법은 순종을 통해서다.
기사를 받은 자가 불순종하면 이적이 없고, 기사를 무시하면 이적을 볼 수 없다.

기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이적은 나와 타인과의 관계이다.
성도의 이적은 하나님이 주신 기사로 말미암는다.
기사는 이적을 몰고 온다.
따라서 이적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지만 기사는 자신만 안다.
기사는 내가 체험하는 것이고 이적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증거는
우리 각인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나타나는 기사와 이적에서 찾을 수 있다.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영광 받으신 것도 알게 된다.
기사와 이적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가 계심을 시인하는 자들에게 있다(요1:14-18).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신앙이 있을 때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다.
복음에 순종하면 보상이 있고, 복음에 불순종하면 평행을 걷는다.
반대로 율법에 순종하면 평행을 걷고 불순종하면 당장 그 보응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2:1) 했다.
곧 복음에 대해서 들은 것이나 율법에 대해서 들은 것이나,
흘러 떠내려갈까 아주 조심하라는 것이다.
세숫대야에 빠진 가락지는 얼마든지 다시 주울 수 있지만,
부둣가에 매어 놓은 배가 바다로 떠내려가면 영영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망각해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흘러 떠내려 보내면 나중에 자기 형편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찾지도 못하고 큰 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

주님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게으르지 아니하고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하면서 여덟 가지를 칭찬하셨다.
그러나‘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어디서 네가 떨어졌는지 더듬어 그것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나는 네게서 촛대를 옮겨 버릴 것이다’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사람 사람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 기분, 기호 따라 교회생활 하면서, 그것이 자기 직분을 지키는 것이며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회개하여 찾으라.’하신 말씀을 따라 어디서 떨어진 문제, 회개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곧 하나님이 구하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자가 많다.

당장 어떤 보응이 없는 편안한 삶을 최고의 신앙생활로 생각하지만,
불신자들처럼 편안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음적 삶은 아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나는 구원하는 자임으로 내 말을 듣지 아니할지라도 나는 저를 심판하지 않지만, 내 말을 받지 않는 자는 내가 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7-48) 하셨다.
천사가 전한 율법도 견고하여 순종치 않으면 보응을 받았거든
하물며 이 큰 구원, 곧 주께서 친히 그 몸으로 이루신 공로와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어찌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히2:2-3)?
율법을 거역하는 것은 그들 육체가 심판을 받는 것이지만
복음을 거역하면 그들 영혼의 영원한 심판이 있다 하심이다.

우리가 복음에 순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시대와 복음시대를 혼동하여 아무 능력이 없는 것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생각하고 뭔가 나타나면 이단이라 한다.
그리고 핍박받으면 잘못된 사람으로 생각한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 일이 없고,
그저 말로서 권고하고 가르치기만 하셨더라면
아무리 세상 신들에게 억압된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착하시고 온유하신 그분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이겠는가.

하나님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기사와 이적들로써 복음에 대해 확증하신다.
신약의 성도에게 이러한 보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온전한 순종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성경에‘혹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했다.

율법도 복음도 하나님의 법이지만,
율법은 사망의 법이라 했고 복음은 생명의 법이라 했다(롬8:1-2).
율법은 보증하시는 이가 거역하는 자에게 보응으로써 그 권위를 세워주고,
복음은 보증하시는 이가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와 권능으로 보증함으로써 그 권위를 세워준다.
그러니 자기가 그저 편안하고 부러울 것 없이 사는 것을 건전한 신앙으로 생각하고 안주하지 않고,
주님께서 마지막 유언처럼 4복음서의 끝자락에 약속하시고,
명령하신 것을 잊지 말고 실행하여
현실에서 기사와 이적으로 보상받고
하늘보좌에 가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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