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일보
오피니언사설
[사설]양심의 자유
박덕규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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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26  1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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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귀를 알아들을만한 어린아이에게 ‘혹시 죄가 있잖은가?’ 하고 물으면, 잠시 생각해 보고는 ‘있는 것 같아요.’ 하는 경우가 많다. ‘무슨 죄가 있는가?, 누구에게 범한 죄인가?’ 하고 물으면 ‘자기의 언행에 대하여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양심의 가책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어른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되묻는다. 죄의식은 있지만 대체로 그것이 큰 문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해결 받을 길도 알 수 없으니 덮어두고 살아가면서도, 선행도 하고 요가나 참선, 혹은 종교 활동을 하면서 방향 없는 화살을 날려 보내기도 한다. 이미 불치병으로 판명된 환자가 살 희망을 포기하고 그저 연명하는 것과 흡사하다 할 것인가. 길을 잃어버려 그렇다.

사실 인류역사의 실상은 그런 정도의 불유쾌함은 당연히 참아야 하는 인생고의 하나였다. 꿀 송이 같은 달콤한 만족이나 행복이 없더라도 그것이 예외 없는 인생길, 그 고단한 여정이었다. 당연히 투쟁과 아픔의 연속이었고, 장차에도 이 어둠의 터널을 탈출하지 못한 채 마지막엔 허무와 좌절 속에 그 인생의 종결을 수용해야만 하는 공통의 길목에 인류는 서 있다. 과거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장차에도 그러하다.

인간 실존의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갈등이 있다. 상실감과 두려움이다. 정상적인 이성기능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곧 과거에 그 뭔가를 잃어버렸을 것 같은 상실감과 장차 닥쳐올지 모르는 두려움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그것을 또 유산으로 물려주게 된다.

그것을 극복하고 모면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물이 지적으로는 정신문화요, 동적으로는 물질문명일터. 그러나 극도의 인류사의 발전을 이룬 현대를 사는 사람들, 그들의 육체는 매우 편리하게 살면서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에 노출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핵무기를 만들고, 그가 재벌일지라도 더 쌓아두려고 가슴 두근거리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너나없이 현실에서 만족을 얻지 못함으로 각가지 난무하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벌이며 가면무도회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자기만의 방어망을 쳐놓고 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혹 자기를 안위하리라는 기대를 한다. 나만큼은 그 숙명을 모면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이는 이성 없는 짐승과의 대비일 뿐, 인간 그 지혜로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 인간의 지식으로는 인간존재의 시작과 그 결말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메바에서 출발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혹 원숭이가 진화했다는 억측을 사실처럼 왜곡하고 또 그같이 후세대를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얼마나 무모한가? 이 같이 제 무덤을 파는 일이 언젠가 끝이 날 것인가. 그러나 인간을 아는 이는 오직 인간을 지으신 신뿐이다.

신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은 오직 지으신 이의 도움으로만 살도록 규정해 놓으셨으니, 이는 인간에게 약점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누릴 최대의 영광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주인을 망각했으므로 상실감에 빠져있고, 그 열매로서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선하시고 의로우신 신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탓하지 않으셨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간에게 신의 은혜를 하사하셨으니 그가 육신을 입으시고 인류 속에 들어오셨고, 인간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는 인류를 초청하셨다. 누구든지 이 사실만 인정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아만 가면 상실했던 그 보화를 다시 찾은 것이요, 그 두렵던 심판이 바뀌어 영생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한다. 이것을 복음이라 한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된다.

길거리를 들여다보라. 거기 숨 가쁘게 달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 눈에 빛이 보이는가. 그 들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서려 있지 않던가. 그들이 배가 고파 그런 것인가. 아님 지금 뭔가에 쫓기고 있어 그런 것인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영생입니다.’ 고 말했다. 애써 태연하려 하지만 그 속에선 갑자기 크나큰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역력하다. ‘혹 마음에 갈등은 없는지요?’ 질문했다. ‘갈등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대답한다.

그러나 갈등 없이 사는 길이 있다. 그 문이 열려 있다. 곧 예수다. 혹 적그리스도의 영이 육체로 오신 예수를 부인할지라도, 그리하여 사람의 마음이 혼미하게 되어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가 몹시 거북스럽다 하더라도 예수만이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어쩌겠는가? 그 길로 가는 도리 밖에 없다. 그리하면 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 진리 안에서만 상실감과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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